단상

[커버스토리] 포스트 386 새로운 리더로 떠오르다

은혜의 샘 2007. 6. 1. 02:18
눈부시게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자기표현이 당당하고 맹목적인 복종을 거부하는 세대. 이념이 아닌 실용을 중시하고 풍요와 빈곤을 동시 경험한 세대. 그들이 우리사회 중심에 섰다. 리더가 없는 사회에 자신을 리더라 생각하는 그들. 그들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

시대는 마치 장강(長江)처럼 흐른다. 그 흐름 속엔 수많은 인물이 명멸해가지만 명멸의 과정은 집단적인 것이다. 시공을 공유하는 집단 안에서 사람은 태어나고 또 죽는다. 우리는 그 집단을 ‘세대’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제너레이션(generation)’이라고 표현한다. 시간적으로는 부모의 뒤를 잇고 자기 자식에게 삶의 사이클을 물려주기까지의 평균 수명이다. 대체로 30년간의 기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의 세대는 보다 급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생물학적 시간성이라기보다 정치·경제·문화적 의미가 강하다. 20대와 30대, 30대와 40대는 각각 강렬한 세대간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 30년의 세대차이를 이제는 5년, 10년 주기로 경험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는 무시무시하고, 단절의 경험 또한 날카롭다.

근대화 이후 가장 의미 있는 모습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각한 세대는 ‘386’이다. 1960년대에 출생해서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90년대 당시의 30대를 의미했다. 1980년대를 ‘처절한 운동’으로 풍미했고, 어느덧 나이 마흔을 넘긴 그들은 우리 사회의 주류, 리더의 그룹에 포함됐다.

▷ 굳이 표현하자면 ‘397세대’

1980년 광주와 87년 6·10을 체험한 이들은 인간과 사회를 변증법적으로, 오직 하나의 이념으로 해석하려 했다. ‘사회변혁’을 공상이 아니라 현실로 받아들인 세대다. 30년 이상 지속한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형식적 민주주의를 완성한 열정적인, 그리고 실천하는 집단이었다.

세월은 장강처럼 흘러 또 다른 세대를 형성했다. 1970년대에 출생해서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지금의 30대다. 굳이 표현하자면 ‘397’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이들은 선배세대와 일정 부분 그 ‘기질’을 공유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생각, 눈부시게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을 향유하고 있는 세대다.

이들은 한국 근대화 과정의 처절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 과실을 누렸던 세대이기도 하다. 세계사적 차원에서 그들은 X세대로 분류되기도 했다. 1990년 캐나다의 더글러스 쿠플랜드가 쓴 소설 ‘X세대’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이다. ‘X’란 기존 세대의 눈으로 보았을 때 ‘딱히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또는 ‘모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X세대는 핵가족화, 대중매체와 정보통신의 발달, 고도 경제성장의 혜택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들은 자기표현에 당당하고 기존 질서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이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문화적 세례를 받았다.포크와 발라드, 트로트와 록 대신 그들은 댄스뮤직과 랩에 열광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인터넷 1세대, 감수성의 세대에 성장한 이들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뚜렷이 구분하며 소소한 일상과 삶의 질에 관심이 높다. 386세대가 집단적이고 목표지향적인 ‘하드파워’인 데 비해 포스트386은 개인주의적이고 문화중심적인 ‘소프트파워’로 분석되기도 한다.

1990년대 대학에 입학한 이들은 구소련의 붕괴, 한국 군사정권의 몰락과 문민정권의 등장을 목격했다. 대학가는 여전히 운동권이 득세했지만 90년대 학번 운동권의 열정은 선배세대의 ‘치열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세상은 점진적으로 변하는 것이고, 사상과 신념은 다양하다’는 이치를 세상의 흐름 속에서 체득하기 시작했다.

이들 X세대는 5~6년 후 또 다른 세대의 출몰을 목도했다. PC통신, 인터넷 시대를 경험하기 시작한 이른바 ‘N세대’를 만난다. 이 두 세대의 가장 큰 공통점은 ‘탈이념’이다. 30대의 전반과 후반을 구성하는 이들 397세대는 개방성, 반(反)권위주의, 가치의 다양성을 유니폼처럼 입고 있는 세대다.

포스트386은 다양한 코드로 규정할 수 있는 세대다. 탈이념, 세계화, 청년기에 맞은 IMF, 실업, 감성주의, 시장지향, 문화·정치적 다원주의, 가상현실, 네트워크, 사익추구, 공동체적 질서에 대한 전망 부재 등이 그것이다.

포스트386은 그러나 정치적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특정 사회 이슈에 대해서는 ‘기성세대’에 완전히 편입된 386세대보다 오히려 더 진보적이다. 집권 기간 내내 ‘좌파정권’이란 비판을 받은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유력한 지지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노 정권 탄생의 주역인 386이 지지를 철회하고 있는 상황에서 포스트386은 여전히 노 대통령에 대해 상당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50% 이상의 386이 현 정권의 국정 실패를 지적하고 있는 반면, 포스트386은 30% 정도만 노 정권의 실정을 인정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 과거사 문제, 대미관계 등에서 포스트386은 386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포스트386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25~35세 연령층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7%, 경제활동 인구의 24%다. 경제와 문화 시장에서는 벌써 주고객으로 자리잡았다. 정치적 영향력도 간과할 수 없다. 40대 중반 이후의 보수층과 386세대의 진보성향을 고려할 때 포스트386세대의 선택이 차기 대선 향배를 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다. 대통령 탄핵 역풍이 거세게 불던 지난 17대 총선 당시 이들의 투표율은 37.1%에 불과했다. 16대 총선과 비교할 때 0.3% 늘었을 뿐이었다. 이들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없어 정치 무관심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들을 대표하는 단어는 이념이 아니라 ‘실용’이다.

바로 위의 386세대가 독재시절을 거치면서 정치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고, 집단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보인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 세계사적 차원에선 X세대로 분류

이들은 왜 이런 독특한 성향을 갖게 됐을까. 환경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흔히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본 세대에 비유된다. ‘단맛’은 기성세대가 이룬 산업화에 따른 경제적 풍요와 386세대가 이룬 민주화의 열매를 의미한다. ‘쓴맛’은 IMF 외환위기와 청년실업 문제다.

PC통신과 해외연수를 처음 경험한 세대이면서 정치운동 영향은 받지 않았다. 대신 취업난에 직면해 있다. 이런 환경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이념에는 무관심하고, 현실적·개인적·개방적·독립적 성향을 갖게 됐다는 분석이다.

포스트386세대의 경제관은 그래서 착잡하다. ‘시장과 실용’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연세대 94학번 송용진씨(33·건설회사 근무)는 그같은 이율배반을 ‘IMF의 상흔’으로 규정한다. 생활고와 취업난을 겪으면서 온몸으로 체득한 ‘생활의 원리’라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2년간이나 취업을 못하고 방황했다. 성장보다는 분배, 규제보다는 시장이 우선한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분배와 평등의 문제에 직면하면 IMF 직후 온 가족이 겪었던 생활고를 떠올리게 된다.”

1997년 12월 IMF의 구제금융이 시작될 당시 20대 중후반이었던 포스트386은 사회 첫 출발부터 모진 ‘인생공부’를 해야 했다. 구조조정 광풍이 몰아치는 살벌한 현실에서 둥지를 틀 새 일터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수십 번의 이력서 제출은 일상적이었고, 그나마 힘들게 들어간 기업은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젊은 인생을 거리로 내몰았다.

IMF의 상흔은 현재진행형이다. 포스트386세대 초반 그룹은 여전히 실직 상태이거나 실업문제로 고통을 겪었던 시절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는 포스트386의 경제적 상흔과 그 귀결을 이렇게 진단한다.

“포스트386의 상상력 공간이 취업난이라는 현실문제로 침해를 받으면 이들의 행진에 비상이 걸릴 것이다. 그러면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로부터 공화주의, 혹은 개입주의로 이들의 세계관이 돌변할 수도 있다. 공익을 소홀히 했다는 성찰적 인식이 갑자기 탄력을 받으면 정권의 경제능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분산과 분배정책의 결과가 빈곤층의 확대 내지 소득 격차의 증가로 귀결된다면 분노할 수도 있다.”

▷ 배낭여행·인터넷 1세대

포스트386은 세계화·국제화 세례를 받았던 제1세대로 기록된다. ‘배낭여행’은 1990년대 포스트386에는 세계로 가는 출구, 지구촌의 실상을 접하게 된 ‘실습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 배낭여행에 몰두, 지금은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는 전문 여행가이드가 된 고진영씨(36)는 당시의 열풍을 이렇게 회상한다.

88서울올림픽 이후 해외여행이 지유화되면서 배낭여행은 나의 꿈과 인생 그 자체였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나는 주저없이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은 대단한 모험으로 간주됐고, 그때 외국에 눈 뜬 젊은이들이 몇 년 후 본격적으로 유학시대를 열었다. 배낭여행은 주머니가 얇은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점을 인식케 했다.”

올해 35세의 스페인어 통·번역사 이현정씨는 1997년 직장을 그만두고 스페인으로 떠났다.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한 열망도 있었지만 서구문화에 대한 궁금증으로 타문화권을 체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2년 후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는 주변 친구들에게 스페인 경험담을 나누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주변의 여러 친구들도 1·2년의 단기, 그리고 장기과정으로 해외 어학연수를 떠났기 때문이다. 배낭여행 세대인 포스트386은 신혼여행도 주로 해외를 선호했고, 이때부터 시작된 해외 신혼여행의 관행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3년에 출간한 홍정욱씨(37·헤럴드미디어 대표이사)의 미국 유학기 ‘7막7장’은 당시 학창생활을 했던 포스트386세대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목숨을 건’ 치열한 공부를 통해 입신에 성공한 그의 유학 스토리가 한국 사회를 강타한 것이다.

포스트386은 인터넷 1세대라는 측면에서 한국 정보화사회의 첨단을 이끌고 있다. 이들의 정보화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에 육박한다. IT산업을 이끌고 있는 CEO를 다수 배출했고 IT기업의 중추를 담당하는 핵심분자로 성장했다. 1994년 6월 한국통신이 최초로 인터넷 상용 서비스(KORNET service)를 개시하면서 이들은 정보통신 혁명의 힘을 절감하며 성장한 세대다.

포스트386은 풍요와 빈곤을 동시에 경험한 세대다. 양극화는 이 세대 안에서도 극명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풍요를 누렸던 포스트386은 어릴 때부터 사교육을 받고 자랐다. 1960년대에 태어난 세대와는 성장과 교육 과정이 다르다. 그래서 이들은 자녀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다.

이들이 최고급 사교육에 눈을 돌리면서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지닌 교육기관에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예약하려는 예비부모로 북적인다. ㅇ대 어린이부속연구원 등 유명 유치원은 임신하기도 전에 예약하려는 부모들로 인해 몇 년간 예약이 밀려 있다. 조기유학과 고액 예능교육도 포스트386 부모들이 주도하고 있다.

포스트386은 이념이 없고 중심적인 지도자가 없다. 아니, 포스트386의 리더는 도처에 깔려 있다. 중심이 없는 사회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개인적이고도 일상적인 삶에 사회의 어떤 조직 원리보다 높은 가중치를 둔다. 그것이 행복인지 불행인지는 단순한 셈법으로 계산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사회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탐험의 지혜를 스스로 터득한 세대다. 즉각적 감흥을 주는 것을 찾아, 감흥과 교류하면서 자아를 형성해온 세대다.”

이들은 온라인을 타고 드나드는 길을 차단하는 모든 장애물을 격파했다. 이들은 다양한 가치와 감성이란 프리즘을 통해 세상과 교신한다. 이들의 감성은 현실세계를 비웃고, 미화하고, 조롱하며 또 찬양한다. 전례 없는 세대, 포스트386세대의 능력과 리더십이 장차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한기홍 편집위원 glutton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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